성철스님에게-옷-한-벌-받은-법정스님이-말하는-참-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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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에게 옷 한 벌 받은 법정스님이 말하는 참 세상은? -운전사가 술에 취해 승객을 위험에 빠뜨리면 운전사를 교체해서     안전하게 목적지에 가야 한다 김정남 / 편집국장을 지냈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곤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어록』을 읽
감옥으로-부터의-사색---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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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127호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 - 신영복 내가 신영복을 먼 빛으로나마 가까이 접한 것은 1988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1987년의 민주화대투쟁으로 이른바 ‘87체제’는 이룩했지만, 야권 단일화의 실패로 사실상 군정의 연장이라 할 노태우 정부가 출현했다. 비록 민주정부의 수립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1987년 민주화투쟁의 연장선 위에서 각개 각 분야에서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었다. 시민운동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요 노동, 교육, 환경 등 모든 분야에서 억제 되어있던 시민의 민주적 요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닭의-목은-비틀어도-새벽은-온다---김영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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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람 -126호 닭의 목은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김영삼(2) 김정남 / 전 편집국장 그러나 그 이후 대선고지까지는 멀고도 험했다. 우선 안기부는 공작을 통하여 YS를 제거할 수 있다고 보고 공작을 계속하였고, 노태우는 내각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수구세력들은 구세력을 끌어 모아 YS를 배제하는 작업을 물밑에서 계속했다. 1992년은 3월의 국회의원 총선과 12월의 대통령선거가 치러지는 선거의 해였다. 이와 같은 밑으로 흐르는 작업과는 별도로 1992년에 들어오면서부터 김윤환을 중심으로 YS 대세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닭의-목을-비틀어도-새벽은-온다---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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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 125호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김영삼(1) 김정남 / 전 편집국장 내가 당시 야당 정치인이었던 YS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75년 연초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는 YS가 1974년 8월, 선명노선을 기치로 내걸고 제1야당 신민당의 당권에 도전, 마침내 46세의 나이로 최연소 야당 당수로 당선된 뒤였다. 유진산의 불투명한 노선에 반기를 들고 탈당해 선명노선을 걷고 있었던 양일동과 장준하의 통일당과 더불어 김영삼의 신민당 역시 이제 막 선명야당노선을 걷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삼선개헌과 유신정국에서 재야민주세
산-자여-말하라---최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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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여 말하라 - 최종선 -124호 김정남 / 전 편집국장 최종선은 서울법대 교수로 재직 중 1973년 10월,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치사당한 최종길 교수의 동생이다. 내가 그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 지금 내 기억에는 명확치 않다. 그가 쓴 기록 『산자여 말하라』(2001, 공동선)에 따르면 1988년 10월 8일 오후, 명동성당 입구의 ‘샤롬’이라는 다방에서였다고 한다. 그때 나는 이제 막 창간한 「평화신문」의 편집을 책임 맡고 있었는데, 나는 그가 1973년에 쓴 「양심선언」을 평화신문에 게재하는 문제를 놓고 그를 불러 상의했다는
무등無等의-대인---홍남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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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無等의 대인 - 홍남순 변호사 -122호 김정남 / 전 편집국장 “장성 갈재 굴을 나가면 / 틀림없이 거기 계시는 / 우리 무등이여 / 진정코 무등과 형제이신 / 우리 취영 홍남순옹이여 고향이여” 고은高銀의 취영송이 아니더라도, 홍남순은 곧 무등이요 광주였으며, 광주와 무등이 곧 홍남순이었다. 홍남순이 버티고 있어서 광주였고, 거기에 홍남순이 있었기에 무등이었다. 특히 이 나라 ‘민주화 30년’에 있어서 더욱 그랬다. 1960년대 이래 크고 작은 민주화투쟁에 홍남순 변호사의 이름이 빠진 적이 없었다. 그 어둡고 괴롭고 살벌했던
「함성」에서-남민전까지---김남주--시인에서-전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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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함성」에서 남민전까지 - 김남주  -121호 -시인에서 전사로 김정남 / 전 편집국장 1972년 12월 9일, 늦은 밤에 광주시내의 여러 학교에 「함성」이라는 제호의 지하신문이 뿌려졌다. 이때는 박정희가 이른바 유신을 선포한지 채 두 달이 안 된 시점이었다. 이 지하신문은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3층 강의실에 50여 매, 상과대학 2층 강의실에 50여 매, 문리대 이학부와 문학부의 강의실과 벤치에 90여 매, 광주고, 광주여고, 광주공고, 광주제일고 등에 각각 20~30매씩 뿌려졌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와 그 주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