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지금보다 나아지도록!”
- 2024 <리얼 뱅크시>展 후기
최윤호 / 신부, 부산교구 용호성당
뱅크시Banksy. 영국과 미국, 그리고 세계의 수많은 분쟁 지역에서 본명을 숨기고 아무도 모르게 작품을 내는 거리 예술가이다. 특히 전쟁과 난민 문제와 관련해서 사회를 고발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 이 정도가 그동안 뱅크시에 대해 필자가 알던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이 얼굴 없는 예술가에게 관심을 가지기는 충분했다. 4월쯤이었나 인사동 ‘그라운드 서울’에서 기획전이 있고, 제법 길게 이어진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는데, 9월 말에 큰맘 먹고 한번 다녀오기로 했다.
골 때리는 양반인 줄은 알았는데, 뱅크시는 필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런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뱅크시가 대단하게 느껴졌던 점은 자신이 그리고 만들어낸 것에 사람들이 열광하자 그로 인해 생긴 수익과 기타 부가적인 효과들을 모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행동으로 변환하였다는 점이다. 몇몇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2015년에 ‘디즈멀랜드Dismaland’1) 라는 테마파크를 설립하였는데, 테마파크를 세우는 데 썼던 자재들과 운영 수익을 전부 프랑스 칼레에 난민 캠프를 만드는 일에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2017년에는 베들레헴 서안지구에 “벽에 가로막힌 호텔The Walled Off Hotel”을 지었다. 이 호텔은 베들레헴을 가르는 장벽에 맞닿아 있으며, 뱅크시 스스로가 ‘세계에서 가장 전망이 안 좋은 호텔’이라고 하였다. 베들레헴 서안지구의 현지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호텔 사업으로 얻은 수입 역시 장벽 안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위해 사용된다. 호텔의 이런 목적 때문인지 뱅크시는 디즈멀랜드와는 다르게 적어도 2017년 내내 호텔 사업을 이어가겠으며, 사람들의 호응이 있으면 그 뒤로도 계속 호텔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었다. 호텔은 2023년 10월 12일까지 정상 운영되다가 현재는 영업 중단 상태에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난민 구조를 위한 선박을 인권 운동가들에게 기증하거나 코로나19 당시 병원에 그림을 그려놓고 나중에 그 그림을 팔아 수익을 의료기관에 기부하는 등의 사례가 있다. 이렇듯 뱅크시는 그의 예술 활동으로 인해 생기는 모든 수입, 그로 인한 명성 등을 최대로 활용하여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움직임이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뱅크시의 예술관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세세하게 다루지 않겠다. 자본주의를 고발하고 반전反戰, 인권에 대해 주로 이야기한다는 정도로만 언급하려 한다. 뱅크시의 예술에 대해 모순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지만 그 역시 따로 지면을 할애하여 언급하지는 않겠다.이 글에서는 필자가 개인적으로 느낀 뱅크시의 종교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뱅크시의 두 작품을 이야기하려 한다.
<날고 있는 군인>(Flying Copper, 2003)
기동복을 입은 무장경찰 또는 군인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단연 돋보이는 부분은 새삼 해맑은 미소를 띤 얼굴과 하늘로 날아갈 듯한 날개, 그리고 정말로 하늘이라도 나는 것처럼 맑고 맑은 푸른색 배경이다. 해맑은 얼굴과 날개, 밝은 배경이 역설적으로 무장 군경이 지닌 폭력성, 무자비함, 평화와는 거리가 먼 분쟁, 전쟁 등의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전달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유독 필자의 시선을 끌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미소 띤 얼굴의 아래 부분에 있는 검은색과 회색으로 칠해진 ‘무언가’였다. 얼굴 바로 아래인 만큼 인간의 신체 부위로는 목과 흉곽에 해당되는 부분인데, 그 부분이 왠지 성직자들의 복장을 연상시키는 것만 같았다. 물론 뱅크시가 정말로 그런 의도를 품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그저 가톨릭 성직자인 필자의 눈에만 그렇게 느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에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면 어떤 메시지를 담은 것일까? 이 세상의 성직자들, 종교인들이 겉으로는 저리 방긋 웃고 있지만, 실상은 억압받는 이들을 더 억누르고, 진정으로 평화를 추구하기보다 자기들의 교리와 이념을 앞세우고 언제든지 총구를 겨눌 수 있다는 그런 의미를 담은 것일까? 행동하지 않고 그저 말로만, 기도로만 억압받고 폭력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한다는 것은 해맑게 웃고는 있지만 실상은 무장하고 총을 든 군인들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를 담은 것일까? 진실은 오직 뱅크시 본인만이 알 것이다.
<동정 마리아 – 독성 마리아>(Virgin Mary – Toxic Mary, 2003)
얼핏 봤을 때 이 작품은 그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저 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젖병을 들고 있고, 그 젖병에는 독극물 표시가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흑백인 채색에 독극물 병만 노란색으로 유독 눈에 띈다. 또한 작가는 이 그림이 전체적으로 마치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나게 만들었다. 아기도 아기를 받쳐 든 어머니도 조금씩 녹아 흘러내리고 있다. 어떤 의미를 전하고자 했던 것일까? 종교가 마치 세상의 독과 같다는 뜻이었을까? 종교의 교리, 가르침과 같은 것들이 인간을 마비시키고 이성적 사고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눈과 귀가 멀도록 만든다는 그런 뜻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작가가 뭔가 의도한 것이 있다면 그것 외에는 마땅히 떠오르질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동정 마리아 Virgin Mary>라는 제목을 달고서 왜 굳이 <독성 마리아 Toxic Mary>라는 부제를 달았겠는가?
뱅크시의 행적을 돌아보면,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테마파크를 열거나 호텔을 짓거나 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분명 뱅크시 역시 유명세를 타기 전까지는 사는 동네의 어느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며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렇게 자그마하게 시작한 것이 점점 불고 불어서 난민 캠프를 만들고, GDP2)라는 가정용품 브랜드를 세우는 등의 활동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어쩌면 종교와도 연관이 된 듯한 그의 작품 속에는 종교계 역시 그렇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그저 교리나 예식에만 얽매인 종교는 사람을 눈멀게 만드는 독이고 총을 든 군인과도 다름없다는 그런 메시지가 있는 게 아닐까?
지금보다 더 나아진 세상을 위해, 이 땅에 하늘나라를 조금이라도 빨리 완성시키기 위해 가톨릭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당장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은 무엇을 하면 좋을까? 우리가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예술가 뱅크시의 요청 앞에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같은 고민에 빠져들기를 희망한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보서 2,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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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즈니랜드Disneyland’와 ‘음울한, 울적한’ 등의 뜻을 지닌 단어 ‘dismal’의 합성어이다. 뱅크시와 다른 예술가들이 합작하여 설립했으며, 처음부터 5주 동안만 운영할 계획으로 세워졌다. 하루 4,000명까지만 관람객을 받았다고 한다.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디즈니랜드의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으며, 현대 사회를 풍자하는 요소가 곳곳에 녹아 있었다.
2)뱅크시가 세운 가정용품 브랜드의 명칭으로 뱅크시의 작품을 활용한 제품들을 판매하거나, 난민들이 입고 난 구명조끼를 리폼하여 만든 Welcome 매트 등등 재활용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GDP(국내 총생산)와 약자뿐만 아니라 철자 전체가 완전히 동일하다: Gross Domestic Product. 이 역시 특유의 풍자·비판을 담은 명명일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