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을 위해 생각하고 실천하는
따뜻한 사회
공동선을 이룩합시다.
| 회사 소개 | 게시판 | 구독 신청 | 관련 사이트   
- 기사 검색
- 기사 분류
  (공동선 단행본)
  (공동선 알림)
  공동선 강론
  공동선을 열며
  공선옥의 풍경과 사
  권두인터뷰
  그 사람
  글 하나 마음 열
  기타
  길 위의 명상
  나의 길
  나의묵상
  대화
  문화
  민들레국수집
  성공하는 협동조합을
  성찰하는 삶
  세상읽기
  아름다운 사람
  어머니
  연재
  이사람
  인터뷰
  일상의 이면
  조광호신부 그림
  탐방
  특집
- 공동선 과월호 리스트

《이전 페이지로 이동》
통권 141호【공동선을 열며】『 벌레로 살다 새 먹이로 가신 오현 스님을 기리며 』 - 김형태 -
<<공동선을 열며>>

벌레로 살다 새 먹이로 가신 오현 스님을 기리며

김형태 / <공동선> 발행인, 법무법인 <덕수> 대표변호사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려 컴퓨터를 켜니 첫 화면에 북해北海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집니
다. 푸르게 투명한 하늘 아래 하얀 설산雪山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그 아래, 하늘보
다 더 짙푸른 바다 수면 위로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유유히 물살을 가릅니다.
순간 전율을 느낍니다. 꼬리를 높이 치켜들고 반지르르 기름기 도는 검은 피부를 자랑하
며 차디찬 북해를 늠름하게 헤엄쳐가는 저 고래. 너무 아름답고 너무 경이롭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 어찌 저리도 멋진 생명체가 있게有 되었을까.
기독교인이며 힌두교도들은 무한하신 창조주 하느님께 깊이 머리 숙일 터이고, 불자들은 
저 고래에게서 부처님의 비어있는 성품, 즉 공空을 볼 겁니다. 노자는 도덕경 첫머리에서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이름이요, 유有는 만물의 어미를 이름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와 유, 이 둘은 본시 같은 것인데 이름이 다를 뿐이라 했습니다. 
현대 과학은 무에서 빅뱅이 일어나 유가 시작되었고, 원소, 먼지, 별의 순서를 거쳐 마침
내 생명체가 나타났답니다. 그리고 기나긴 진화의 무대에 북쪽 바다의 저 아름다운 고래
며, 우리 집 마당가를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신퉁방퉁한 개미들이며, 빤짝빤짝 빛나는 꼬
마 녀석이며, 빨간 꽃망울 유도화 화분 한 귀퉁이를 염치없이 가득 채운 까마중들이 등장
해서 저마다 있음有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긴 세월 이런 저런 생각들 사이를 헤매 다니다
가 이제는 이 모든 생각들이 다, 같은 말씀의 여러 변주곡이라 여기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피조물이란 말은 저 스스로 독립적으로 고유 성품을 유지하며 영원히 존재할 수
는 없다는 뜻이니, 있음有도 아니고 있지 않음無도 아닌 공空한 성품이라는 불교의 개념
과 같은 소리요, 무와 유가 본시 같은데 이름이 다를 뿐이라는 노자 말씀이나 빅뱅이며 진
화론이 다 그 소리가 그 소리지 싶습니다.
우리는 말이나 이름, 개념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니 유니 무니 불
성이니 하며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으나, 한번 말이 되고 나면 결국 그 말에 매여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하느님’하고 이름 붙이니 우리 보다 힘 센 ‘존재’의 하나로 
여겨 살려 달라 빕니다. 하지만 주역에서 신은 어떤 고유의 모습이 없고 단지 어짐仁으로 
나타나고 사랑이라는 작용 속에 숨어 있다고 합니다. 
‘비가 온다’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습도가 높아지고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만나는 조건
의 결과물이 ‘내리는 비’입니다. 그런데 비가 온다고 ‘말’해 버리면 마치 ‘비’라는 고정된 
존재가 있어 어디 숨어 있다가 지금 여기로 떨어지는 양 착각을 하게 됩니다. 착각을 피하
려면 용수보살 식으로 ‘내리는 비가 내린다’고 말하는 게 좋을 듯도 합니다. 비는 피조물
이고, 공空합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나’라고 말하고 나니 이 ‘나’도 우주 시작 이전부터 어딘가에 숨어 있
다가 지금 이 생에 나타났고 죽은 뒤에도 다시 어디로 이동하는 걸로 생각지어 집니다. 
그런가? 
오래전, 그러니까 2005년, <공동선> 5, 6월호에서 오현 스님도 이 이야기를 하셨더군요. 
불교에서는 기독교의 부활을 어찌 보느냐는 물음에 스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내가 아는 부활은 시체가 다시 사는 게 아닙니다. 순간순간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게 
부활이죠. 불교에는 一日一夜일일일야 萬生萬死만생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 낮 하
루 밤에도 만 번이나 태어나고 만 번이나 죽는다는 뜻입니다. 매 순간 생과 사가 갈린다
는 거죠.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죠. 과거에
도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말고 오로지 오늘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
다.”
타력신앙인 기독교와 자력신앙인 불교는 서로 다른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스님 답변
은 이랬습니다.
“교인이 천 명이면 하느님도 천 분이라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에게는 모두 하
느님의 씨 예수님이 깃들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탐욕과 죄로 인해 예수님의 모습이 
가려져 있을 뿐이죠. 거듭남을 통해 참된 나를 회복하면 내 마음 안에 있는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되살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오염되지 않은 모습 그대로가 예수이고, 따라서 우
리 모두가 예수입니다. 불교가 불상을 갖다놓고 부처라 하며 복을 구하듯이, 십자가를 세
워두고 복을 구하다보니 이런 본래의 뜻을 잃어버린 거죠.”
불교 윤회사상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기독교 맹신자들 생각과 비슷한 데가 있지 
않느냐고 묻는 데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누군가를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나는 보살로 태어나며, 누군가를 못 
살게 굴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 아수라로 태어나는 거죠. 착한 마음은 보살과 선인
으로, 악한 마음은 아수라와 악인으로 윤회하게 합니다. 윤회는 죽어서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끝없이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거죠. 부활도 이생에서 끝없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옛 것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거듭나고, 바로 그 거듭남이 곧 부활인겁니다.”
바오로 사도의 코린트 후서 5장 17절이 떠오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
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오현 스님은 생전에 종교 기득권자들에게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절집은 승려들의 숙소일 뿐이니 절집에만 ‘당신들의 천국’을 만들지 말고 세상 속에서 진
리를 찾고 세상과 함께 하라. 고통 받는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필요 없다. 천 년 전 중국 
산 속 늙은이들이 뱉어 놓는 죽은 말들(선사들의 법어)만 듣고 살지 말고 프란치스코 교
황처럼 중생들과 고통을 나누라.”
교회 안에만 머물지 말고 모욕 받고 상처받더라도 저자거리로 나가라. “그리스도인이 자
기가 속한 모임이나 본당, 거기서 이루어지는 활동에만 갇혀있다면 병이 들고 말 것입니
다. 저는 병든 교회보다 길거리에서 사고를 당한 교회가 수만 배 더 좋습니다.”라 외치신 
교황님 말씀과 꼭 같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삶과 죽음을 노래하셨습니다.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
니더냐/ 이 다음 숲에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엊그제 오현 스님이 정말 새의 먹이로 가셨습니다. 어디, 고정 불변의 오현 스님이 있어 
이 욕계慾界에 오셨다가 저 무색계無色界로 해탈하신 게 아니라 ‘새의 먹이로’. 아니, 새
의 먹이가 되시는 게 바로 해탈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차디 찬 북쪽 바다를 유유히 헤엄쳐가는 저 아름다운 고래나 오현 스님이나 
벌레나 숲속의 새가 다 하느님의 피조물이요, 진화의 산물이요, 그 본 모습은 공空한 불성
을 지녔답니다.
《이전 페이지로 이동》

Copyright(C)2003 by 도서출판 공동선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강남구 강남대로 442 흥국생명빌딩 7층 Tel : 02-558-2746 Fax : 02-557-4176 사업자등록번호 : 대표이사 : 김형태